엎어진, 엎지러진

20년 만에 빈병 보증금이 오른다는 소식에 술꾼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우려가 들려온다. 그런 우려와는 별개로 보증금이 오르면 아이들에게 좋은 용돈 벌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20년 전,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어디서 빈병 보증금을 받아주는 지도 모르지만, 20년 전 만해도 집 근처 슈퍼마켓 가지런히 쌓여있는 빈병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슈퍼, 거기가 바로 빈병을 주면 돈으로 바꿔주는 곳이었다. 양손 가득 유리병을 든 아빠를 따라 가면, 사이다나 초코우유 같은 것들을 마실 수 있었다. 베란다에 쌓인 빈병들은 탕수육 쿠폰마냥 나에겐 음료수 쿠폰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였을까, 아빠가 물을 뜨러 약수터에 나가실 때와는 다르게 빈병을 바꿀 땐 항상 따라 갔던 것 같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아빠가 사이다를 마시고 싶어했다. 난 유리병을 몇개를 들고가서 사이다로 바꿔오라는 심부름을 받았다. 마침 나도 사이다를 마시고 싶었기에 흔쾌히 심부름을 하러 갔다. 끙끙대며 유리병을 옮기고 아저씨에게 병을 보여주곤 냉장고 아래에서 시원한 사이다 한병을 꺼냈다. 사이다를 먹을 생각에 얼마나 신났던지,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이 시원한 사이다를 얼른 먹고 싶다는 일념하에. 그러다 넘어졌다ㅠ

죽기 직전에 삶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인다고 하던데, 나는 그 광경을 초등학생 때 목격했다. 돌뿌리 같은 것에 걸려 나는 앞으로 넘어졌고 손에 잡고 있던 사이다 병이 바닥과 부딪치며 산산조각 났다. 사이다는 하얗게 말라있던 콘크리트 바닥을 덮었고 곧이어 거품이 올라왔다. 부산에 가서 처음 파도를 보았을 때, 마음 속으로는 사이다 병 깨지던 모습을 상상 했을 것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들어와 순식간에 거품처럼 사라졌다.

아프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제정신도 아니었다. 사이다를 먹을 수 있다는 설렘이 너무 큰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라, 정신이 수습되지 않았다. 그렇게 OTL 자세로 한참동안 있었던 것 같다. 집에서 기다릴(사이다를) 가족들이 생각나 일단 집으로 갔다. 그리곤 방금 일어난 일을 설명하다가 울음이 터졌다. 무거웠던 빈병, 시원한 사이다, 깨진 사이다 병까지 이야기 하다 결국 울어버렸다.

회사 근처에 위메프에서 하는 W 카페라는 곳이 생겼다. 작은 사이즈를 주문하면, 공짜로 큰 사이즈로 업그레이드를 해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어서 요즘 종종 가고 있다. 거기에 파는 메뉴 중에는 샌드위치와 핫도그도 있었는데 아침으로 먹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처음으로 그 메뉴를 먹어보러 갔다.

핫도그와 아메리카노로 이루어진 세트 메뉴는 3500원이었다. 일반 핫도그 말고 갈릭 스노윙이라는 고급져 보이는 소스가 들어간 것을 먹고 싶어서 500원을 더 냈다. 그렇게 4000원을 내고 네모난 상자에 담긴 핫도그와 작은 커피를 받고 나니, 아침으로는 좀 비싼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걸 먹는 날은 오늘 말고는 없을 것 같았다.

회사 근처라고 했지만,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다. 이걸 왕복해야 하는게 조금은 짜증이 났는지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안넘어졌다. 핫도그 녀석만 넘어졌다ㅠ

핫도그를 담은 상자가 밀봉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직사각형으로 긴 상자는 위 아래로 뺄 수 있게 되어 있는 형태였지만, 겉보기에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세로로 들면 핫도그 소스가 한쪽으로 쏠리기에 핫도그를 가로로 들고 있었고, 그게 빠질 수 있는 형태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리곤 그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핫도그가 인도 한가운데 떨어졌다. 20년 전 사이다를 들고 넘어졌을 때처럼,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기에 잠시 안정을 취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이 내 핫도그를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추가금 500원짜리 소스가 있는 쪽이 바닥을, 소스가 없는 쪽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도 더럽다고 생각했던 길이기에 털어 먹을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아무렴 소스가 벌써 바닥과 합체 한 상태인데 이걸 먹을 순 없었다. 다시 집어서 일단 상자에 넣었다.

평소라면 버렸겠지만, 상황상(?) 그럴 순 없었다. 저 먼길까지 걸어와서 아침으로 사온 건데, 이걸 버리는 순간 내 아침도, 내 4000원도 다 산산조각 나는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는 결단을 내렸다. 살릴 건 살리고 버릴건 버리기로.

소스가 있는 쪽은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땅에 닿지 않은 쪽만 조심스럽게 먹었다. 그 쪽에는 빵과 소세지의 일부만 있는 쪽이기에, 결국 추가금 500원까지 내가며 산 갈릭 스노윙 소스는 한입도 맛 볼 수 없었다. 무슨 맛이었으려나.

지난 20년 동안 많이 성숙해진 것 같다. 20년 만에 다시 맞이하는 상황에서, 그 때만큼 당황하지도 울지도 않았다. 버릴 건 버렸고 살릴 건 살렸다(라지만 배고파서 땅에 흘린 걸 주워먹은거지ㅠ). 엎어진 것은 엎어진 것이고 내가 할 것은 그 뒤에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 그게 지난 20년 간 얻은 교훈인 것 같다.

그래도 10년 뒤, 20년 뒤까지 기억 나는 건 당황하고 망치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겠지만.

ps.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닥에 널부러진 핫도그 사진을 찍어놨어야 했는데 그 정신까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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