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내 주소록에 들어있는 여자들 중 절반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에 한두번 만나긴 했지만 이름을 봐도 누군지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언제 어디서 소개팅을 했었는지도 잘 기억이 안난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모른채 매번 비슷한 스무고개를 하며 만난 사이지만, 가끔은 지금까지도 뚜렷히 기억 나는 대화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소설을 좋아하는 여자와 나누던 이야기다.

본인과 주위에 있는 친구들 모두가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소설을 좋아하긴 하지만 굳이 찾아서 읽지는 않는 나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많이 작가라면 김연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화제는 우리의 주요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문장을 너무 잘쓴다는 말, 최근에 새로운 작품이 나왔다는 소식, 그리고 갈수록 글쓰기 실력이 좋아지는 것 같다는 말들까지.

그 이야기들 중 중 가장 놀랐던 이야기는 단연 마지막 말이었다. 갈수록 글쓰기 실력이 일취월장한다니, 어떻게 어른으로 다 자란 사람이 하루하루 글쓰기 실력이 성장 할 수 있을까? 이건 흡사 드래곤볼 같은 소년 만화에서만 볼 수 있을거 같은 능력이었다. ‘세상 끝 여자친구’라는 소설을 쓴 ‘세상 끝 소설가’라고 불릴만한.

문장력이 짱짱맨이라는, 지금은 초사이어인4나 5정도 되는 문장력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김연수의 최신 작품을 결국 한참이 되도록 읽어보질 못했다. 나에게 3번째가 될 김연수의 책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보통 큰 회사에 가면 복지가 좋다고 하지만, 전 회사에서는 다른데는 없는 더 큰 복지가 두개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한달에 통신비를 50만원까지 지원해준다는 것이다. 한달에 50만원을 통신비로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나에게 되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정작 그렇게 쓰다보면 어렵지 않게 50만원 가까이의 통신비를 쓸 수 있다. 동영상과 이북으로 30~40만원 어치씩 구매를 하다보면….

그렇게 미리 사놓은 책들 중에는 김연수의 책들도 몇권 있었다. 회사를 나오곤 그렇게 모아놓은 책들을 하나둘씩 읽어가고 드디어 김연수의 책을 읽을 차례가 돌아왔다. ‘청춘의 문장들’, 이름만 봐도 딱 서른살에 읽기 좋아 보이는 책이다.

10년 전에 삼십대 중반이던 김연수가 쓴 이 수필집인 이 책은 내가 이 블로그, 이전 블로그, 이전 이전 블로그에서 하던 것들을 책으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받게 했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과거에 대한 기억들과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쓰는 글들, 바로 그것에 대한 책이었다. 그게 첫번째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지점이라면 다른 하나는 앞에 말한 초사이언 같은 글쓰기 능력에 관한 것이다.

책을 읽으면 감탄을 금치 못한다는 김연수 작가지만 10년 전 글이라면 지금과는 사뭇 다를 수 밖에 없다. 지구도 한방에 부실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인 손오공도 3권 정도에서는 공룡에게 쫒기는 살짝 강한 수준(?)에 불과하다. 김연수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짱짱맨일지는 몰라도 10년 전에 쓴 글을 왠지 왠지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문장력이었다. 소설이 아닌 수필이라 좀 더 미사여구를 줄이고 좀 더 단백하게 써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나도 저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예전에 내가 쓴 글들 중에 몇몇은 저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10년을 꾸준히 하면 나도 초사이어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직업으로 글을 쓰는 건 엄청 힘들긴 할거 같다.

재미 자체로는 김연수가 써낸 단편집보다는 덜 재미있었지만, 기억은 더 많이 나는 책인 것 같다. 시인이 된 사연이나, 내가 잘 알지 못하는 90년대의 대학 풍경, 요절한 조카의 이야기까지, 아무래도 픽션이 아니기에 좀 더 담담한 문체로 글을 적기에 더 오래 기억나지 않나 싶다.

덕분에 나도 까먹고 있었던 그 옛날 소개팅에 대한 기억을 다시금 찾았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그 중에서도 김연수의 소설을 가장 좋아했던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을. 다시 김연수의 책을 읽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그 순간들이 다시 떠오를 것이다. 책이 나오면 나올 수록 점점 더 글이 아름다워진다며 나에게 이야기하던 그 문장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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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와 파리

문을 닫고 집을 나오는데 참새 한마리가 보였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를 참새가 창에 계속 머리를 박고 있었다. 계단 쪽에는 커다란 통유리가 있다. 거기에 보이는 하늘을 보곤 나가고 싶어 머리를 박고 꼬꾸라지고 다시 일어나서 머리를 박고, 이걸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참새의 모습이 안쓰러운지, 아니면 나갈 창문 하나 없는 것도 모르곤 계속 창에 꼬라 박고 있는 모습이 마치 우리네 삶과 같아 보여서 인지, 그냥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참새를 구해주고 싶지만 저렇게 움직이는 새를 직접 잡기에는 무서웠다. 그렇다고 불쌍하게 저렇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차선으로 오후에 돌아오는 동생에게 참새 구출을 부탁했다. 그 때쯤에는 참새가 힘이 떨어져서 사람이 잡으러 와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때 잡아다가 밖에 풀어주면 될 듯 했다. 그렇게 마음의 짐을 덜었다.

그러다 문득 이 광경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딱 1주일 전에도 같은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다만 대상과 숫자만 달랐을 뿐.

지난 주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파리 때들이 복도를 헤매고 있었다. 녀석들은 참새와 같은 심정으로 밖에 나가고 싶어 창문 주위에서 계속 왱왱 돌아다녔다. 창문 쪽에 붙어 있었기에 직접적으로 나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냥 나가고 오갈 때 보이는 모습이 너무 보기 싫었다. 얼마나 보기 싫었는지 집에 들어와서 TV를 보며 쉬는데도 자꾸 파리 생각이 났다. 그래서 모기약을 집어 들고 계단으로 나갔다.

다음날 아침, 계단으로 나와보니 바닥에는 수 많은 파리들이 떨어져 있었고 소수의 녀석들만 탈출을 위한 몸부림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어떠한 불쌍함이나 미안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머지 소수의 파리들도 깔끔하게 없애버릴까라는 생각만 들었고 그 생각은 귀찮음을 이기지 못해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참새와 파리, 이 둘에 대한 나의 상반된 반응에 나 스스로 놀랐다. 일반적으로 파리는 해충이고 참새는 아니라고 하나 그렇게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 이러한 반응은 단지 다른 동물을 볼 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해가 된다고 생각 되는 일, 예를 들어 우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혹은 나쁘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대한 반응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노숙인들을 보고 사회의 암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그들을 위한 집을 만들어 무료로 주자고 해도, 이를 찬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파리에 대해 보였던 반응처럼 길거리에 계속 두어 일찍 없어지길 바랄지도 모르겠다. 그 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버려졌지만 귀여운 강아지나 고양이는 보호소를 만들자고 생각할지도 모를것이다.

여러 책에서 읽은 것처럼 호감도는 그 사안에 대해 판단을 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게 글을 읽고 글로만 이해했었는데, 이제서야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몸소 알게 되었다.

다음에 또 똑같이 파리 때를 만난다면 모기약을 들곤 나가진 않을 것이다. 참새와 대하는 것과 같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큰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은 그들을 없애거나 그러진 않을 것이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옥상에 있는 바퀴벌레 친구들은 어떻게 죽인담. 어서 박멸해야 할텐데.

지붕

악몽에 악몽을 꾸며 힘들어하고 있을쯤, 옥상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 때문에 다시 한번 깼다.
누가 내 방 바로 위 지붕에서 걸어다는 것 같이 소리가 들렸다.
쿵쿵쿵, 스르륵스륵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계속 들렸다.

이건 사람 또는 쥐 혹은 고양이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아침 6시 밖에 안되었으니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쥐 혹은 고양이일텐데 제발 귀여운 고양이 이길 빌며 옥상으로 나갔다.

얼마 전 정리하려고 했지만 녹이 너무 심해서 접지도 못하고 그냥 세워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시선은 지붕과 높이를 맞춰가고 있었고 지붕에 점점 가까워졌다.
지붕을 보는 순간 쥐들이 나를 반기진 않을까? 그걸보곤 놀라서 사다리에서 떨어지진 않을까? 걱정하며 내게 필요한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쥐와 고양이 둘 다 없었다.
대신 새가 있었다.
까치 4마리가 옆집과 우리집을 오가며 쿵쿵 뛰어 놀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쥐와 고양이가 날라서 오지 않는 이상 우리집 지붕에 있을리 만무했다.
아무 것도 없는 지붕에 목숨 걸고 날라올 녀석들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까?

얼마 잠도 못잤지만 오늘 하루를 시작해야겠다.

먼지

분명 청소한지 얼마 안되었을텐데, 도무지 깨끗해지지 않는다.
먼지 하나 없어 보이는 이 책상엔 먼지가 계속 쌓인다.

영화 속과 밖

엄청나게 기묘한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제목을 단 7번째 시리즈 영화를 촬영하던 중 주인공 중 한명이 죽었다. 그리고 1년 뒤 그가 찍던 영화가 7이라는 숫자와 함께 개봉을 하였다. 전작의 시리즈를 단 한 편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의 죽음을 소식으로 들었던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무시 할 순 없었을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여러가지 어려움을 헤쳐나간다. 손에 땀이 차는 장면이 많을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죽을 거라곤 상상하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절대 죽지 않는 주인공이 영화 밖에서는 죽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화려한 액션 장면에 놀라워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영화 밖에 계속 생각 날 수 밖에 없었다. 중반을 넘어가니 화려한 액션도 사라지고 죽지 않는 주인공 모드가 시작되었다. 지루하다. 주인공과 친구들은 악당을 물리칠 것이다. 악당은 벌을 받고 주인공은 행복하게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고인을 추모하는 한 줄의 자막이 빨리 나오길 기대하며 지루함과 싸워야했다. 그리곤 영화의 마지막 씬.

결국 이 영화는 죽은 폴 워커를 추모하기 위한 이야기였다. 영화 속에서 계속 말하던 “나는 아직도 총알이 그립다”라는 말의 뜻을 그 때가 되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를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엔딩곡, 그리고 마지막 장면.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가 연기가 아니라 현실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제서야 2시간 내내 나를 괴롭히던 괴리가 풀렸다. 그는 떠났다, 영화 속 그리고 영화 밖 둘 다.

경찰관

새벽에 자다가 끊임없이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듣곤 깼다. 인터폰을 받으니 경찰인데 뭐 좀 물어볼게 있다고 했다. 지난 번 쓰레기 사건 때문에 초인종 소리만 들으면 짜증이 났는데 몇시인지도 모를 새벽에 이러니 겁이 났다. 뭔가 내가 범죄에 연루된건가? 아니면 늑대의 탈을 쓴 도둑이 경찰이라고 속이고 문을 열어달라는 것일까? 얼마 전에 본 성범죄율 전국 1위 ‘서울 중구’라는 글도 생각나고 그래서 문은 열진 않고 현관문 앞에서 대화를 시도하였다.

경찰관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할머니와 같이 사냐고 물어보았다. 동생과 같이 산다고 말하니, 혹시 치매 할머니가 이 건물에 사는지 되물어왔다. 추측하건데 순찰을 돌다가 헤매고 있는 치매 할머니를 발견하였고 이 건물에 사는걸 발견하곤 건물로 온 것이었다. 우리집이 제일 꼭대기 층이기에 우리집이 주인집인줄 알고 초인종을 눌렀고 나는 3층에 주인분이 산다고 이야기를 해드렸다.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다시 누워선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4시 25분, 이 때까지 그 할머니는 어느 길에서 그렇게 헤매고 계셨던 걸까?

침대의 과학

침대를 산지 4년이 넘었지만 에이스에서 말하던 “침대는 과학입니다”라는 말을 몸소 느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비로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게 되었다.

요 몇일 이상하게 충분히 잠을 자도 계속 피곤했다.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 일찍 일어나서 운동하자고 다짐을 했고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 12시 취침, 8시 알람 2개를 강행했다.

약속된 8시. 좋은 멜로디에 짜증나는 알람은 어김없이 울렸고 잠에서 깼다. 피곤함을 참아가며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치 자석에 끌리는 금속마냥 침대에 착 달라붙어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드디어 4년 만에 침대가 과학임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10분자고 다시 못일어나고, 20분 자고 못일어나고를 반복했다. 그걸 몇번이나 거쳤을까? 침대에서 일어날 정도로 힘을 축척하니 어느 덧 시계는 10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또 망했다. 역시 침대는 과학이었다.

4년

이 집에 딱 4년 살고 이제 내일이면 이사를 간다.
짐을 싸면서, 구석에 처박힌 물건들을 하나둘 정리하면서 지난 4년을 되돌아보았다.

신입사원연수에서 받았던 가방부터 책꽃이에 고이 간직해 놓았던 생일축하용 꼬깔모자까지.
좋은 기억들은 좋은대로 아쉽고 슬픈 기억들은 슬픈대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 그래서 내가 이사를 가게 되었다.

졸업하곤 처음 서울 오던 날 저녁 같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흥분과 걱정들이 교차하던.
새로운 집과 새로운 일, 이제 다시 시작이다.
양재는 이제 마음 속에 담아야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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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작년 무렵이었던거 같다. 가방에 항상 물티슈 하나는 넣고 다니는데 마침 물티슈가 떨어진 상황이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진 모르겠으나 “물티슈 하나만 주세요”라며 소원을 빌었다. 그리곤 횡단보도를 건넜는데 거기에 있던 근처 교회 사람들이 교회 오라며 교회 이름이 적힌 물티슈를 나눠주었다.

지난 주 로또를 사는데 그 기억이 나더라. 그래서 소원을 빌었다. 어젯밤 확인해 보니 이번 주도 또 소원을 빌어야 할 것 같다.

생각하건데, 로또를 사면서, 자녀들의 대학 합격, 취업을 기원하면서 신에게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소원을 비는 사람은 많은데도 불구하고, 간절함이 점점 더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로또 당첨자나 명문대 입학생의 수는 그대로인걸 보면 별 소용이 없는 것 같다. 사실 신이라고 한들 그 소원을 다 들어주면 별 의미가 없는 것을 알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그 많은 사람이 로또에 되면 1등 상금으로 몇만원 밖에 못 될테니.

그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신이 들어줄만한 소원의 범위 또는 소원의 총량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전교 1등이 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어도 1명의 소원 밖에 들어줄 수 없다. (공동 1등 이런건 논외로 하자). 하지만 나처럼 “물티슈가 갖고 싶어요” 이런 거는 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오늘 예쁜 여자 보게 해주세요 라던가.

반대로 어려운 소원 또는 서로에게 상충되는 소원은 빌어도 별 영향이 없을 것이다.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 한정적이라면 결국 말 그대로 신은 주사위를 던지고 말 것 이다. 누구에게는 소원이 누구에게는 저주가 될텐데, 신이 어찌하겠는가?

그래, 이제 작은 소원만 빌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물티슈급 소원만 빌어야겠다.

아참, 그런데 나는 무교인데 누구한테 소원을 빌었을까?

불면의 시작

몇일 전에 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밤만 되면 왜 잠이 안올까라는 주제로 말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어난지 가장 오래된 시간이니 밤에는 졸려야 하는데 졸리지 않고, 오히려 한참 잠을 보충한 이후인 아침에는 졸렸다. 비슷한 맥락으로 밥을 먹은지 얼마 안된 시간인 밤에는 계속 배가 고프고, 정작 아무 것도 안 먹은 아침에는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이 이상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니, 나의 불면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도 이렇게 잠드는데 어려운 적은 없었고, 대학생 때도 아니었고, 대학원 때도 잠이 안와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는 없었다. 결국엔 만병의 원인이자, 스트레스의 주범이며, 병원에가 가면 항상 이루어질 수 없는 진단으로 내려주는, 회사 생활이 불면의 원인으로 결론 내려졌다.

이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가 분명 있었는데, 글 제목을 적고는 글을 쓰다가 까먹었다. 그래서 이 글을 이모양으로 끝맽는다. 끝.